유학 가는 길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06-04-01 17:38

조회수 2,405

아까부터 남편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내 눈치만 보고 있다.
모른체 했더니 주머니에서 수성펜 3개를 내놓는다.
"선물이야."
나는 남편이 나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렸다.
남편은 아주 가끔 수성펜 3개의 뇌물공세를 한다.
그것을 받을 때마다 수성펜 3개의 값을 톡톡히 치루지만
나는 언제나 처음 당하는 것처럼 일부러 당해준다.

남편은 계면쩍어하며 이력서 한 통을 내놓았다.
이력서에는 두꺼운 안경을 쓴
보기에도 고지식해 보이는 청년의 사진이 있고
그의 학력과 경력이
잘 쓰여진 글씨로 쓰여있었다.
연세대 법대 졸업
총신 대학 신학 대학원 입학
그것을 읽을 때 남편은
"이 사람이 입학시 전체 수석 합격자야."로 시작하더니
칭찬하느라 어쩔 줄 모른다.
그렇게 훌륭한 전도사를 우리교회 중고등부 전도사로 청빙하는데
왜 나의 동의가 필요할까
왜 선물공세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의아해하는 나에게 결국 남편은 속내를 말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숙식을 해야 하거든.
당신이 밥만 지어주면 되는거야.
부모님이 사업을 하시다가 빚을 많이 지어서
학교에 다녀온 후 밤새 번역을 해서 그 빚을 갚고 있어.
빚쟁이들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거든
이 전도사가 우리 교회에 오면 아이들에게는
그 전도사를 조금만 닮아가도 얼마나 좋겠어."
이젠 애원에 가까워진 남편의 목소리에서
나는 남편이 이미 그 전도사에게
그 모든 것을 다해주마하고 약속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무조건 따라 주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약간 토라진 목소리로
"우리 먹는 반찬대로예요." 라는 말로 허락을 했다.

교회 사무실 한 쪽을 막은 것이 그 전도사님의 방이 되었다.
여름에는 춥고 겨울에는 혹독히 추운 방.
그 날부터 그 방의 불은 꺼질 줄 몰랐다.
학교에 다녀 온 후엔 매일 밤을 새우며 번역을 했다.
나는 우리 먹는대로 먹여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우리처지에 대단한 음식을 마련할 수는 없고
된장찌개에 바지락도 조금 더 넣고...
김치찌개에 고기 몇 점을 더 넣고...
반찬은 잘 해주지 못하니 밥만큼은 끼니 때마다 새로 지었다.

그는 언제나 예의 바르고. 씩씩했다.
밥상에 들러 앉아 밥을 먹을 때면
"사모님! 이 두부가 왜 이렇게 맛이 있지요?"
우리 아이들이 동의치 않는 얼굴을 하면
"나만 맛있나?" 하고 쑥스러워 한다.
아이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 나만 맛있나?" 로 합창을 한다.

나는 매일 밤 볼 수 있었다.
우리 식구들이 다 잠든 깊은 밤이면
밑빠진 독에 물붓듯 끝이 없는 부모님의 빚을 안고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힘들어서
울고 또 우는 그의 몸부림을...

단 하루도 편하게 잠자지 못하고
번역으로 밤을 새우던 시간이 1년이 지났다.
그토록 어두운 기색없이 밝고 씩씩하던 그는
어느날 짐보따리를 꾸렸다.
"사모님! 이젠 더 이상 못하겠어요.
돈 많이 벌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어요.
저는 신실한 신학자가 되어
우리나라 신학을 지키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신학교수가 되고 싶었어요.
대학원은 장학금으로 다녔지만
유학의 길은 어림도 없잖아요.
그럴바엔 일찍 그만두고 법조계로 가야겠어요.
그동안 저에게 너무 잘해 주시고 애쓰셨는데
실망시켜 드려 마음이 아파요."

"포기하지 말아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그 편하고 넓은 길 버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왜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겠어요.
더구나 전도사님이 돈이 없는 것을
매일밤을 새우며 하나님께 신호를 보냈잖아요.
분명히 전도사님이 졸업을 할 때쯤이면
유학을 가야 할 때쯤이면
하나님이 유학 가는 길을 여실 거예요."

나의 간곡한 만류로 짐을 풀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그의 진심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또다시 밤을 새우는 생활을 계속했다.
교회에 한 대 놓여져 있던 성능 나쁜 컴퓨터로
그의 나이 27세에 저술한 " 외우기 쉬운 헬라어"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신학을 하는 모든 신학도들의 필수책이 되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나
대학원 졸업식을 며칠  남겨두었을 즈음.
그는 얼굴이 상기되어 교회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사모님! 고맙습니다.이것좀 보세요."
그가 내놓은 서류는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에서 장학생으로 선발된 통지문이었다.
학위를 받을 동안 사용할 25평의 아파트.
비행기 티켓까지!
우리 식구 모두는 "와! 하나님 너무 멋지세요. 전도사님 축하해요."
교회 바닥이 꺼지도록 뛰면서 기뻐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곳에서 생활할 생활비는 횃불 장학금이 대어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대학 교수들이 모아서 주는 횃불장학금은 연간 10,000$
그는 대학원 졸업식 참석도 못하고 유학의 길에 올랐다.
나는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너희들도 유학 갈 때는 장학금도 주고
아파트도 내주고
비행기 티켓도 보내고
오세요. 제발 우리 학교에 와서 연구해 주세요 할 때
못이기는 척 하면서 유학 길에 오르는거야.
저 전도사님처럼 알았지?."
아이들은 그렇게 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몇 년후.
학위 논문 서문에 남편과 나의 이름을 쓰고 또 써서
우리에게 고마움을 전했던 그는
수 십권의 번역서와 전무후무한 방대한 신학 서적을 저술하였다.
영어, 독일어, 화란어, 히브리어, 헬라어...
많은 나라 언어에 능통해진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그는 지금도 부모님께 너무 잘하는 효자이시다.

지금은 천안대학교 교수로 수원 신학 교수로
우리나라 정통 신학의 가장 참신한 교수로 인정 받고 계시다.
그 교수님의 서재엔 지금도 여전히 밤새워 연구하는 정열이 있을 것을 안다.

나는 남편의 선택에 수성펜 3개로 잘 넘어가 준 것이
지금도 감사할 뿐이다.
내가 치룬 댓가에 비해
주님께서 갚으신 것이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예견했던 대로
그 분과 2년동안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생활한
우리 아이들이 그 분을 똑같이 닮아가고 있다.
밥을 먹을 때는 감사하며 맛있게 먹는 것을
공부는 최선을 다하여 하는 것을
주님을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다 버릴 줄 아는 것을
뜻을 품으면 포기 하지 않는 것을
유학 가는 길은 그렇게 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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